은회색 위의 단풍잎 — 1960년대 초 한국 벽지가 소화한 서양 식물지 문법
화면의 구성 은회색 바탕 위에 여러 계열의 잎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화면 중앙을 차지하는 것은 단풍이나 포도를 연상시키는 5엽의 큰 잎들입니다. 우측 상단에는 물푸레나무나 아카시아 계열을 연상시키는 작고 가는 우상복엽(羽狀複葉)이 자리잡고, 배경에는 깃털처럼 성긴 양치류의 실루엣이 흩어져 있습니다. 여기저기 포도송이 같은 작은 열매들도 숨어있습니다. 하나의 식물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 식물의 잎과 열매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이른바 ‘식물지(植物誌,...
낯선 고향 — 번역된 풍경, 낭만화된 조선
광주광역시 구동의 한 한옥 문간채 어느 방에서 이 벽지가 발견되었습니다. 한옥이 지어진 해는 1937년, 그러나 이 벽지는 그보다 한참 뒤인 1960~7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본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건물이 완전히 리모델링되면서 벽지 역시 사라졌고, 지금은 사진으로만 그 모습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한 장면의 구성 좌측 하단에 물가에 선 정자가 있습니다. 팔각 또는 육각 평면, 기와 지붕의 곡선, 수면에 드리워진 반사. 경복궁 향원정이나 창덕궁 부용정 계열의 조선...
종이 위의 대숲 — 1960년대 한국산 벽지에 담긴 대나무의 두 얼굴
미서기문 위의 대나무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제작된것으로 추정되는 벽지 원본 스캔 이미지(Source : Collection of Gosate)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에 지어진 한옥의 미서기문을 들여다보면, 크라프트지 위에 크림색과 올리브색으로 인쇄된 벽지가 나타납니다. 수직으로 늘어선 뾰족한 타원형들, 그 사이를 채우는 짧은 수평 대시들. 대나무 숲입니다. 줄기는 극도로 단순화되어 있습니다. 붓의 농담도, 잎의 세밀한 묘사도, 마디의 입체적 표현도...
유라시아를 횡단한 십자: 조선화된 비잔틴의 유산
1. 비잔틴의 옥타그램과 두 갈래의 경로 본 패턴의 핵심 구조인 십자가 중첩패턴은 비잔틴 제국의 모자이크와 장식 예술에서 유래합니다. 기하학적 정합성을 추구했던 비잔틴의 장식 문법은 제국의 쇠퇴와 영향력 확산 과정에서 크게 두 갈래의 경로로 전파되었습니다. 첫 번째 경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이르는 서유럽 노선입니다. 비잔틴의 격자 문법은 19세기 고딕 복고주의(Gothic Revival)와 결합하여 중세 성당 바닥을 장식하던 엔코스틱 타일(Encaus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