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없는 비단벽 — 1970년대 한국산 다마스크 벽지

펄프지 위의 궁전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제작된것으로 추정되는 벽지 원본 스캔 이미지(Source : Collection of Gosate) 1970년대 초 한국에서 생산된 이 벽지를 처음 마주하면, 낯익은 듯 낯선 인상을 받게 됩니다. 펄프지 위에 흰색과 카키색 2도 인쇄로 찍힌 수직 띠. 그 안에 좌우 대칭의 곡선 잎사귀들이 거울처럼 마주 보며 수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띠와 띠 사이에는 가느다란 […]

4월 18, 2026

펄프지 위의 궁전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제작된것으로 추정되는 벽지 원본 스캔 이미지
(Source : Collection of Gosate)

1970년대 초 한국에서 생산된 이 벽지를 처음 마주하면, 낯익은 듯 낯선 인상을 받게 됩니다. 펄프지 위에 흰색과 카키색 2도 인쇄로 찍힌 수직 띠. 그 안에 좌우 대칭의 곡선 잎사귀들이 거울처럼 마주 보며 수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띠와 띠 사이에는 가느다란 세선(細線)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서양 인테리어에 익숙한 눈이라면 즉시 알아볼 것입니다. 다마스크 스트라이프(damask stripe) — 유럽 벽지의 가장 고전적인 형식 중 하나입니다.

다마스쿠스에서 한반도까지

다마스크라는 이름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왔습니다. 원래는 비단 직조 기법이었습니다. 광택이 나는 면과 무광 면이 교대하며 직물 위에 문양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중세 지중해 무역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궁정에서 실내 벽면을 비단 다마스크 직물로 덮는 것이 큰 유행이 되었고, 이 호사스러운 장식은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비단 벽걸이를 살 수 없는 가정을 위해, 18세기부터 종이 벽지가 그 대체재로 등장했습니다. 다마스크 메달리온을 수직 띠 안에 가두고 핀스트라이프와 교대 배치하는 형식 — 다마스크 스트라이프 — 은 18~19세기 유럽 벽지의 표준형이 되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금박, 플로킹(flock, 벨벳 질감을 모방한 식모 가공), 다색 인쇄 등을 동원하여 원래의 비단 질감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했습니다.

이 벽지에 보이는 모티프들 — 아칸서스 잎에서 파생된 곡선 스크롤, 팔메트(palmette), 튤립형 꽃봉오리, 중심축 기준의 거울 대칭 — 은 모두 유럽 다마스크 장식 전통에서 직접 온 것입니다. 동아시아적 요소는 사실상 보이지 않습니다.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제작된것으로 추정되는 벽지 원본 스캔 이미지 디테일
(Source : Collection of Gosate)

두 가지 색으로 쓴 번역

그러나 이 벽지가 유럽 다마스크의 단순한 복제인 것은 아닙니다. 유럽 다마스크 벽지가 비단의 질감, 색채의 깊이, 소재의 촉감까지 모방하려 했다면, 이 벽지는 펄프지 위에 흰색과 카키색 두 가지 색만으로 그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금박도, 플로킹도, 보석 톤의 다색 인쇄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펄프지의 자연색과 두 가지 잉크뿐입니다. 그런데 이 물질적 제약이 오히려 독자적인 시각적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유럽 다마스크가 “부유함”을 말했다면, 이 벽지는 같은 문법으로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흰색과 카키의 담백한 조합은 유럽 궁정의 화려함이 아니라, 1970년대 한국 가정의 깔끔하고 단정한 근대성을 표현합니다.

당시 한국 벽지에서 흰색과 카키색은 전형적으로 자주 사용되던 색 조합이었습니다. 이 익숙한 색조 위에 낯선 서양 문법이 얹어지면서, 완전히 서양적이지도, 그렇다고 한국 전통적이지도 않은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장식의 끝자락

비단에서 종이로, 궁전에서 한옥으로, 다마스쿠스에서 한반도로. 이 벽지가 걸어온 길은 결국 장식의 민주화라는 더 큰 흐름의 한 장면입니다.

시리아의 비단 직조 기법이 유럽 궁정의 벽면 장식이 되고, 그것이 인쇄 벽지로 대중화되고, 마침내 한국의 펄프지 위에 두 가지 색으로 도달한 것. 매 단계마다 소재는 격하되고 가격은 내려가지만, 장식적 의지 — 자신의 벽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욕구 — 는 결코 격하되지 않습니다.

펄프지 위의 흰색-카키 다마스크. 비단의 광택도, 금박의 화려함도 없지만, 이 벽지를 골라 자신의 방에 붙인 1970년대 한국의 누군가는, 다마스쿠스의 비단 장인과 같은 욕망 (일상의 벽 위에 아름다움을 입히려는 욕망) 을 공유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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