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자 위의 다마스크 — 1940년대 다마스크 벽지와 동아시아의 붓끝

‘월자(Weolja)’ 벽지 원본 스캔 이미지 (Source: Collection of Gosate) 시각적 관찰 1940년대의 어느 한옥에서 발견된 이 벽지(이하 ‘월자’)는, 펄프지 위에 초록색 잉크 한 가지만으로 찍어낸 1도(度) 인쇄물이다. 70여 년의 시간을 지나며 펄프지는 황갈색으로 산화했고 초록 잉크의 채도도 가라앉았지만, 표면에 새겨진 도안의 골격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단 한 가지 잉크로 찍었음에도 […]

6월 15, 2026

1940s

격자 위의 다마스크 — 1940년대 다마스크 벽지와 동아시아의 붓끝

‘월자(Weolja)’ 벽지 원본 스캔 이미지 (Source: Collection of Gosate) 시각적 관찰 1940년대의 어느 한옥에서 발견된 이 벽지(이하 ‘월자’)는, 펄프지 위에 초록색 잉크 한 가지만으로 찍어낸 1도(度) 인쇄물이다. 70여 년의 시간을 지나며 펄프지는 황갈색으로 산화했고…

저자
GOSATÉ Archive
작성일
2026. 06. 15
연구 분류
벽지 문양 연구
시대
1940s
격자 위의 다마스크 — 1940년대 다마스크 벽지와 동아시아의 붓끝

‘월자(Weolja)’ 벽지 원본 스캔 이미지 (Source: Collection of Gosate)

시각적 관찰

1940년대의 어느 한옥에서 발견된 이 벽지(이하 ‘월자’)는, 펄프지 위에 초록색 잉크 한 가지만으로 찍어낸 1도(度) 인쇄물이다. 70여 년의 시간을 지나며 펄프지는 황갈색으로 산화했고 초록 잉크의 채도도 가라앉았지만, 표면에 새겨진 도안의 골격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단 한 가지 잉크로 찍었음에도 화면이 두 개의 톤으로 읽힌다는 사실이다. 이는 두 번째 색을 더해서가 아니라, 솔리드하게 채운 문양의 실루엣과 그 아래 깔린 미세한 격자의 망점 밀도를 달리한 결과다. 색을 늘리지 않고 선의 농밀(濃密)만으로 명암과 깊이를 빚어낸 것이다. 전시 말기의 물자 부족 속에서 잉크 한 도수를 아끼는 일은 곧 원가의 문제였고, 이 벽지는 그 제약을 양식으로 전환해낸 영리한 절약의 사례다.

한 빛깔의 격자, 비단의 알리바이

화면 전체에는 미세한 격자가 깔려 있다. 주요 문양 아래로 흐르는 이 그리드는 인쇄상의 부산물이 아니라 분명히 의도된 바탕이다. 격자는 “이것은 종이가 아니라 직물”이라는 시각적 신호를 보낸다.

이 신호는 표면 문양이 **다마스크(damask)**라는 점을 떠올릴 때 한층 의미심장해진다. 다마스크라는 말 자체가 본디 견직물의 직조 문양에서 온 이름이고, 다마스크 벽지의 존재 이유는 애초에 “벽에 비단을 두른 듯” 보이게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벽지에서 격자는 단순한 충전 텍스처가 아니라, 종이를 직물로 위장시키는 ‘직물성(textile-ness)’의 알리바이로 기능한다. 종이가 비단을 흉내 내고, 그 비단다움을 격자가 한 번 더 보증하는 이중의 구조다.

다마스크라는 골격

도안은 오지(ogee)·마름모 격자 위에 펼쳐진 전형적인 올오버(all-over) 다마스크 구조를 따른다. 격자의 교차점마다 방사형의 데이지·아스터형 로제트(rosette)가 또박또박 앉고, 그 사이를 좌우대칭의 스크롤(소용돌이) 문양이 잇는다. 빈 공간은 작은 꽃이 충전 모티프로 메운다. ‘중심 로제트 — 연결 스크롤 — 충전화’로 이어지는 이 위계는 서구 다마스크 벽지의 직계 문법이며, 멀리는 프랑스·영국 다마스크 벽지의 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벽지는 서양 양식의 충실한 모방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 단서는 문양의 ‘끝’에 숨어 있다.

Fig. 1. ‘월자’ 패턴의 구조 분석. 오지·마름모 격자 위에 중심 로제트와 좌우대칭 스크롤이 배열된 전형적 다마스크 구조. (Source: Collection of Gosate)

둥글려진 끝 — 서양 문양 위에 얹힌 동양의 손

유럽 아칸서스(acanthus) 문양의 정의적 특징은 톱니처럼 들쭉날쭉한 잎 가장자리와 뾰족하게 갈라지는 결각이다. 그리스식은 잎 끝이 날카롭고, 로마식으로 가며 다소 둥글어지더라도 결각과 율동적인 말림만큼은 끝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월자’의 스크롤은 그렇지 않다. 톱니가 거의 사라지고, 끝이 매끈하게 둥근 갈고리·곤봉 형태로 맺힌다. 이 둥근 종결은 서양 아칸서스의 어휘가 아니라, 오히려 동아시아 당초(卷草)·여의(如意)·운문(雲紋) 계열의 모국어다. 여의의 머리가 주먹·구름·영지(靈芝) 형태로 둥글게 닫히듯, 이곳의 스크롤도 매끈한 곤봉형으로 마무리된다. 서양의 골격 위에 동양의 붓끝이 얹힌 셈이다.

서양의 날카로운 아칸서스가 동아시아의 손을 거치며 둥글고 뭉툭하게 번안되는 이 현상은, 앞서 교동도에서 발견된 ‘재호’ 벽지를 다루며 자세히 살핀 바 있다. 1930~40년대 상하이의 광고 도판 월분패(月份牌)가 보여주던 ‘상하이 모던’의 미감 — 서양 양식을 동양화의 붓맛으로 둥글게 풀어낸 그 감각 — 이 ‘월자’의 종결부에도 똑같이 흐른다.

관련 글: 1943 교동(喬桐): 제국의 잉크, 그리고 벽지 뒤의 현실

한 가지 경계할 점은 적어둔다. 유럽에도 ‘둥근 아칸서스(로마식)’가 존재하므로, 끝이 둥글다는 사실만으로 곧장 동양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판단의 기준은 둥근가가 아니라 톱니와 결각이 살아 있는가인데, ‘월자’의 종결부는 그 결각이 거의 소거된 매끈한 곡선이다. 또한 1도 활판·석판 인쇄에서는 미세한 뾰족함이 인쇄 과정에서 뭉개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의 끝은 단순히 잘려나간 것이 아니라 둥글게 말려 맺힌다는 점에서, 인쇄의 한계라기보다 의도된 양식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Fig. 2. 스크롤 종결부 상세. 톱니 없이 둥글게 맺히는 곤봉형 종결은 서양 아칸서스보다 동아시아 당초·운문의 어휘에 가깝다. (Source: Collection of Gosate)

하나의 가설 — 서양의 그릇, 동양의 손

정리하면 ‘월자’는 두 개의 층위를 품는다. 구조는 서구 다마스크, 세부의 종결은 동아시아 당초다. 서양의 비단무늬라는 그릇 안에, 동양의 붓끝이 빚은 둥근 곡선이 담긴 혼종(hybrid)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런 절충은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서 익숙한 조작이었다. 서구 양식을 골격으로 받아들이되 디테일을 동양식으로 무르게 풀어내던 흐름 — 그 대표적 무대가 상하이의 하이파이(海派) 양식이었다. 다만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 도달한 벽지의 가장 직접적인 경로가 일본의 제조·유통망이었음을 고려하면, 일본의 제지 회사가 상하이·만주·조선 시장을 겨냥해 ‘대륙풍(大陸風)’으로 기획·생산한 제품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이 한 폭의 초록빛 비단무늬가 당시 동아시아 3국을 관통하던 ‘서구적 근대’에 대한 욕망의 자장 안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 추론이 확정되려면, 동일하거나 유사한 다마스크 도안을 가진 당시 일본제·중국제 벽지 견본이나, 종결부를 같은 방식으로 둥글게 처리한 동시대 도안첩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 전까지 ‘월자’는, 서양의 비단무늬가 동아시아의 붓끝을 거쳐 한옥의 벽에 도달한 — 양식적 번역(translation)의 조용한 한 표본으로 남는다.

격자 위에 한 빛깔로 짜인 이 비단은, 그 기나긴 번역의 끝에서 여전히 바스락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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