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hoto by Gosate 2025)
1. 디자인의 원류: 물결로 짠 로마의 모자이크
1. 디자인의 계보: 로마에서 러시아로
이 벽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화면 전체를 유영하는 검은 물결입니다. 굵게 그려진 파상선(波狀線)은 단순한 무늬가 아니라, 마치 로마나 비잔틴 바닥 모자이크의 줄눈(grout)처럼 작동하며 타원형과 팔각형의 메달리온들을 엮어 거대한 그리드를 형성합니다. 바깥 띠, 중간 띠, 그리고 안쪽의 원판으로 이어지는 이 삼중 구조는 고대 지중해 모자이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문법입니다.
기요슈(Guilloche)의 여정
이 꼬인 물결 패턴은 기요슈(Guilloche)라 불립니다. 로마 시대 모자이크 바닥과 벽을 장식하던 이 문양은 두 가지 역할을 했습니다. 첫째, 중앙의 주요 장면(신화적 인물이나 기하학 문양)을 둘러싸는 액자 역할. 둘째, 각기 다른 패널들을 연결하는 경계선 역할.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이 장식 문법은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졌고, 교회 바닥과 벽면을 장식했습니다.

Roman guilloche around a scene with Diana the Huntress, late 2nd century AD, mosaic, Bardo Natinal Museum, Tunis, Tunisia
비잔틴 제국이 쇠퇴한 후에도 이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비잔틴의 종교적·문화적 유산을 계승하면서, 기요슈 패턴은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프레스코화, 성화(이콘), 그리고 장식 직물에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직물에서도 이 패턴이 발견되는데, 이는 비잔틴의 영향이 동방 전역에 확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텍스처의 환영
내부의 디테일 또한 이 ‘모자이크적 환영(Illusion)’을 충실히 따릅니다. 메달리온 사이를 채우는 붉은 잔점들은 석조 모자이크의 입자감이나 자수 직물의 텍스처를 인쇄로 흉내 낸 장치입니다. 덕분에 이 벽지는 멀리서 보면 짜여진 카펫이나 단단한 타일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잉크의 점으로 흩어지는 시각적 이중성을 갖습니다.
2. 지리의 추측: 만주와 러시아의 그림자
서구에서는 보기 드문 패턴
흥미로운 점은 이런 기요슈 메달리온 패턴이 서구권 벽지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로마-비잔틴 모자이크가 유럽의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19~20세기 영국, 프랑스, 미국의 벽지 디자인에서는 이 패턴이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서구는 주로 다마스크, 플로럴, 스트라이프, 네오고딕 문양을 선호했고, 기요슈는 주로 건축 장식의 몰딩이나 코니스에 쓰였지 벽지의 주요 패턴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1945년 전후 한국(조선)에서 이 패턴이 벽지로 등장했을까요?
만주국과 러시아의 접점
하나의 가설은 만주를 경유한 러시아적 취향의 유입입니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이었지만, 지리적으로는 러시아/소련과 긴 국경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만주국의 도시들—특히 하얼빈(Harbin)—에는 러시아계 이주민이 많았고, 러시아 정교회 성당도 세워졌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러시아적 미감과 일본의 생산 기술이 공존했습니다.

당시 슬라브계 정교회에서 자주 쓰던 기요슈(Guilloche) 문양을 볼 수 있다.
《비잔틴 및 고대 러시아 문양집 1887》(러시아어 원제: Сборник византийских и древнерусских орнаментов) 181~182p
일본은 만주국과 조선에 동시에 벽지를 공급했습니다. 만약 일본 벽지 회사가 만주 시장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을 선택했다면, 러시아 정교회 문화권에 친숙한 비잔틴식 메달리온 패턴을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도안이 조선에도 유통되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가설입니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 정황들이 이 가설을 뒷받침합니다:
1. 서구권 벽지에서의 희소성: 이 패턴이 서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왔을 가능성
2. 비잔틴-러시아 연결의 확실성: 기요슈 메달리온은 러시아 정교회 장식의 전형
3. 만주-러시아의 지리적 근접성: 하얼빈 등 러시아계 인구 거주
4. 일본의 만주-조선 동시 공급: 같은 생산 시설, 같은 유통망

(Source: Collection of Gosate)
3. 전쟁의 기호학: 훈장, 기어, 타겟
메달리온 안의 군사적 모티프
메달리온 중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통적인 꽃이나 과일 장식과는 다른 요소들이 눈에 띕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오각별(Five-pointed star)입니다. 오각별은 19세기 이후 군대의 계급장과 국가 상징에서 널리 사용된 기호입니다. 당시 소련과 미군 모두 오각별을 사용했습니다.
중앙의 로제트를 둘러싼 네 개의 구조물은 꽃봉오리나 횃불을 단순화한 것으로 보이지만, 기계적으로 처리된 그 형태는 기어(Gear)나 톱니바퀴를 연상시킵니다. 십자가 팔 끝의 원형 구조는 타겟(Target)이나 조준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Source: Collection of Gosate)
3. 시대의 그림자: 톱니바퀴와 훈장, 그리고 한옥
1945년 전후 한국 벽지의 공통 경향
이러한 모티프들은 이 벽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1945년 전후 한국에서 생산된 여러 벽지들에서 유사한 패턴이 확인됩니다:
- 오각별과 육각별의 반복적 사용
- 기어나 톱니바퀴를 연상시키는 기계적 로제트
- 동심원 구조의 타겟형 문양
- 군복의 훈장이나 메달을 닮은 메달리온 구조
고사테가 수집한 다른 동일 시기 벽지들간 비교분석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전쟁에서 영감을 얻은 모티프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1940년대 초중반은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일본은 총력전 체제에 있었습니다. 전쟁은 단순히 전선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군사화하고 산업화했습니다. 공장, 기계, 군대의 이미지가 일상 곳곳에 침투했습니다.

(Source: Collection of Gosate)

(Photo by Gosate 2026)

(Photo by Gosate 2023)
장식의 군사화
디자이너가 명시적으로 “전쟁을 그리겠다”고 의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하고 반복적으로 노출된 시각 언어는 군대와 공장의 기호들이었습니다. 훈장, 계급장, 기어, 타겟, 별—이 모든 것들이 전시 체제 하에서 일상적으로 보던 형태였습니다.
전통적인 꽃 장식을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형태 – 즉, 기계적이고 기하학적이며 군사적인 도상을 자연스럽게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결과 메달리온 안의 꽃은 톱니바퀴처럼, 장식 별은 군대의 별처럼, 원은 타겟처럼 변형되었습니다.

(Source : wikimedia common, public domain)
5. 비잔틴에서 한국전쟁 까지. 도안의 기나긴 여정
이 벽지는 여러 층위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서 출발해 비잔틴을 거쳐 러시아로 이어진 기요슈 패턴의 긴 여정. 만주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있는 러시아적 취향. 그리고 1940년대 전쟁 시대가 장식에 남긴 군사적·기계적 흔적.
이 모든 요소들이 1945년 전후 한국이라는 특정 시공간에서 만나, 한 장의 벽지로 결정화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정확한 경로로 도착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패턴이 서구권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동방 정교회 문화권과 전쟁 시대의 시각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중해에서 흑해를 거쳐 만주와 조선으로, 그리고 전쟁의 기호들을 거쳐—한 장의 종이 위에 새겨진 물결과 메달리온은, 그 누구도 완전히 의도하지 않았을 문화적·역사적 여정의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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