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강진 병영성까지: 1944년 벽지에 담긴 디자인 여행

1. 텍스처 분석: 종이 위에 직조된 ‘직물(Fabric)’의 환상  전남 강진군 병영성 근방에 위치한 1940년대초 고택에서 발견된 일제강점기 벽지 ‘순애’ 원본과 고사테 복원본 벽지(Source : Gosate wallpaper, Gosate collection) 이 벽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단연 ‘그물망(Grid)’ 텍스처입니다. 이 패턴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서구권, 특히 영국에서 유행했던 ‘직물 모방(Textile Imitation)’ 기법으로 보입니다. 당시 서구의 벽지 제조사들은 평면적인 […]

2월 11, 2026

1. 텍스처 분석: 종이 위에 직조된 ‘직물(Fabric)’의 환상 

전남 강진군 병영성 근방에 위치한 1940년대초 고택에서 발견된 일제강점기 벽지 ‘순애’ 원본과 고사테 복원본 벽지
(Source : Gosate wallpaper, Gosate collection)

이 벽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단연 ‘그물망(Grid)’ 텍스처입니다. 이 패턴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서구권, 특히 영국에서 유행했던 ‘직물 모방(Textile Imitation)’ 기법으로 보입니다.

당시 서구의 벽지 제조사들은 평면적인 종이에 입체적인 깊이감을 주기 위해, 꽃무늬를 인쇄하기 전 배경에 캔버스나 린넨, 혹은 거친 마직물의 질감을 모방한 격자무늬를 먼저 인쇄했습니다. 이는 벽지를 바르면 마치 벽면 전체가 고급스러운 ‘타페스트리(Tapestry)’나 ‘니들포인트 자수(Needlepoint Embroidery)’로 마감된 듯한 착시 효과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발견된 1943년 벽지 조각은 세월의 풍화로 인해 화려했을 꽃무늬 안료(주로 유기 안료였을 붉은색과 녹색 계열)는 산화되어 사라졌지만, 상대적으로 내구성이 강한 배경의 ‘그물망 패턴’과 전체 패턴의 음영만 남아있습니다.

벽지 ‘순애’ 원본 스캔 이미지
(Source : Gosate collection)

2. 디자인 계보: 윌리엄 모리스에서 동아시아로 

이러한 스타일의 원류는 19세기 말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자연물을 소재로 한 풍성한 패턴과 수공예적 질감을 중시했던 이 흐름은, 20세기에 들어서며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계식 표면 인쇄(Surface Printing) 기술과 결합하여 대중화되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패턴 디자인 (19세기 말)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을 이끈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은 자연물의 유기적 배치와 밀도 높은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양식은 훗날 1920~30년대 대량 생산된 ‘타페스트리 스타일(Tapestry Style)’ 벽지의 미학적 뿌리가 되었다.
Pink and Rose by William Morris (1834-1896). Original from The MET Museum. Digitally enhanced by rawpixel.

동시대 유럽의 아카이브를 살펴보면, 이러한 ‘격자무늬 배경의 꽃무늬 벽지’가 영국을 중심으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국제 양식(International Style)으로 유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강진의 한 주택에 발린 이 벽지는 당대 세계 디자인의 최전선에 있던 유행 양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유입 경로의 추적: 제국과 식민지, 그리고 상인의 길 

1943년이라는 시점과 강진이라는 장소성을 고려할 때, 이 벽지의 출처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일본을 경유한 영국풍 모조 벽지’입니다. 1930년대 이후 전시 체제 하의 일본 제조업체들은 영국의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모방하여 ‘양풍(Western Style)’ 벽지를 생산했고, 이를 식민지 조선의 모던 주택이나 상업 공간에 공급했습니다.

하지만 ‘직수입품’의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벽지가 발견된 강진 병영성은 전통적으로 물산이 집산되는 상업 도시였으며, 개항 이후 서구 문물이 유입되는 경로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지역의 유지나 상인 계층은 경성이나 일본을 통해 유입된 오리지널 영국제 벽지를 구하여 자신들의 공간을 장식함으로써 근대적 과시 욕구를 충족시켰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벽지 ‘순애’가 발견되었던 1944년작 강진 병영성 부근 고택 전경
(Photo by Gosate)

4. 결론: 벽지 한 조각에 담긴 시대의 층위 

결론적으로, 강진 병영성에서 발견된 이 벽지는 ‘1930년대 영국 타페스트리 스타일’을 원형으로 하여, 일본의 산업적 모방 또는 상인들의 교역망을 통해 1943년 조선의 지방 도시에 도달한 ‘근대적 인테리어의 파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색이 바래고 그물망과 전체 패턴의 그림자만 남았지만, 이는 당대 사람들이 꿈꾸었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직물로 감싸인 서구적 공간’에 대한 열망이 화석처럼 남은 흔적이라 하겠습니다. 이 벽지는 고사테(Gosate)가 추구하는 ‘사라져가는 패턴의 복원’을 넘어, 그 시대의 생활사와 미의식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아카이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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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텍스트 및 분석: 본문의 모든 텍스트와 학술적 분석에 대한 권리는 저자에게 있습니다.사진 자료: ‘Gosate Collection’ 및 ‘Photo by Gosate’로 표기된 모든 실물 촬영 이미지의 저작권은 고사테에 있습니다. 사전 협의 없는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인용 자료: 별도로 출처가 명시된 역사적 도판 및 인용 이미지는 해당 저작권자 또는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규정에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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