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결을 찍어내다, 1970년대 초 ‘금박(金箔) 엠보싱 다마스크

1. 디자인의 해부: 금실로 수놓은 ‘종이 브로케이드’ 이 벽지는 눈으로 보기 전에 “직물 같다”는 인상이 먼저 듭니다. 바탕을 덮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유럽식 다마스크 계열의 넝쿨 문양입니다. 중앙에 응축된 꽃과 잎 모티브를 S자 곡선의 아칸서스 잎이 감싸며 좌우 대칭을 이루고, 위아래로 작은 열매가 이어지며 끊김 없는 식물의 띠를 형성합니다. 이 연속적인 흐름에 리듬을 부여하는 것은 중앙의 ‘물방울 장식’입니다. 둥근 […]

2월 2, 2026

1. 디자인의 해부: 금실로 수놓은 ‘종이 브로케이드’

이 벽지는 눈으로 보기 전에 “직물 같다”는 인상이 먼저 듭니다. 바탕을 덮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유럽식 다마스크 계열의 넝쿨 문양입니다. 중앙에 응축된 꽃과 잎 모티브를 S자 곡선의 아칸서스 잎이 감싸며 좌우 대칭을 이루고, 위아래로 작은 열매가 이어지며 끊김 없는 식물의 띠를 형성합니다.

이 연속적인 흐름에 리듬을 부여하는 것은 중앙의 ‘물방울 장식’입니다. 둥근 하단에서 위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이 실루엣은 페이즐리(Paisley)의 기원인 ‘보테(Boteh)’ 문양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단순한 점이 아니라 그 안에 다시 잎과 곡선을 채워 넣어 작은 메달리온처럼 연출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벽지의 화룡점정은 ‘금박(Metallic Pigment)’입니다. 무광에 가깝게 인쇄된 넝쿨 사이사이에 금속성 안료로 처리된 방울들이 박혀 있어, 시선의 방향과 빛의 각도에 따라 각기 다른 층위의 반짝임을 선사합니다. 이는 마치 실크 다마스크 바탕 위에 금사(金絲)로 자수를 놓은 고급 ‘브로케이드(Brocade)’ 직물을 종이로 완벽하게 치환한 듯한 효과를 냅니다.

다마스크 패턴 실크 직물 사진
(Source : Rawpixel, “Fragment”, public domain image, https://www.rawpixel.com/image/8848765/fragment)

2. 기술의 진화: 엠보싱, ‘그리는’ 질감에서 ‘만지는’ 질감으로

이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완성하는 결정적인 기술은 ‘엠보싱(Embossing)’입니다. 1960년대까지의 한국 벽지가 점묘나 해칭을 통해 직물의 질감을 평면 위에 ‘그려내는(Emulation)’ 수준이었다면, 이 벽지는 종이 표면을 실제로 솟아오르게 하여 ‘만져지는’ 질감을 구현했습니다.

넝쿨과 꽃, 잎맥을 따라 미세하게 솟아오른 능선과 골은 손끝에 뚜렷한 촉감을 남깁니다. 이 요철은 조명을 받을 때 미세한 그림자를 만들어, 종이 벽지를 실제 도톰한 직물이나 석고 몰딩처럼 보이게 하는 입체감을 부여합니다.도상은 전통적인 다마스크 어휘를 따르고 있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은 평면을 넘어 입체로 나아간 1970년대의 새로운 기술적 감각을 보여줍니다.

3. 시대의 맥락: 1970년대, 안방의 격식을 높이다

이 벽지가 제작된 1970년대 초는 한국 벽지 산업에 유럽으로부터 가열 롤(Heated Roller)을 이용한 기계식 엠보싱 공정이 도입되던 ‘새로운 기술의 개화기’였습니다. 이 벽지는 그러한 초기 시도를 대표하는 사료입니다.

패턴의 구조와 스케일로 볼 때, 이 벽지는 집 안의 가장 중요한 공간인 안방이나 응접실, 혹은 고급 호텔 객실을 위한 고급 마감재로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마스크 모티브는 넓은 벽면에 시공했을 때 안정감을 주며, 금박 포인트는 조명 아래에서 공간의 격조를 높여줍니다. 천장지보다는 벽면용으로, 그것도 손님을 맞거나 집안의 위계를 보여주는 공간에 걸렸을 법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1960년대의 정교한 평면 인쇄 기술 위에,1970년대의 엠보싱과 금박이라는 신기술을 더해 시각적·촉각적 밀도를 한 단계 끌어올린 벽지. 이것은 한국의 주거 공간이 ‘단순한 장식’을 넘어 ‘질감과 빛’을 탐미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Copyright © 2026 Gosate Archive. All Rights Reserved.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고사테(Gosate)**에 있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1. 텍스트 및 분석: 본문의 모든 텍스트와 학술적 분석에 대한 권리는 저자에게 있습니다.
  2. 사진 자료: ‘Gosate Collection’ 및 ‘Photo by Gosate’로 표기된 모든 실물 촬영 이미지의 저작권은 고사테에 있습니다. 사전 협의 없는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3. 인용 자료: 별도로 출처가 명시된 역사적 도판 및 인용 이미지는 해당 저작권자 또는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규정에 따릅니다.

이용 문의: contact@gosate.kr

About the Author

Related Posts

런던에서 강진 병영성까지: 1944년 벽지에 담긴 디자인 여행
런던에서 강진 병영성까지: 1944년 벽지에 담긴 디자인 여행

1. 텍스처 분석: 종이 위에 직조된 ‘직물(Fabric)’의 환상  전남 강진군 병영성 근방에 위치한 1940년대초 고택에서 발견된 일제강점기 벽지 ‘순애’ 원본과 고사테 복원본 벽지(Source : Gosate wallpaper, Gosate collection) 이 벽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단연 ‘그물망(Grid)’ 텍스처입니다. 이 패턴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서구권, 특히…

유라시아를 횡단한 십자:  조선화된 비잔틴의 유산
유라시아를 횡단한 십자: 조선화된 비잔틴의 유산

1. 비잔틴의 옥타그램과 두 갈래의 경로 본 패턴의 핵심 구조인 십자가 중첩패턴은 비잔틴 제국의 모자이크와 장식 예술에서 유래합니다. 기하학적 정합성을 추구했던 비잔틴의 장식 문법은 제국의 쇠퇴와 영향력 확산 과정에서 크게 두 갈래의 경로로 전파되었습니다. 첫 번째 경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이르는 서유럽 노선입니다. 비잔틴의 격자 문법은 19세기 고딕 복고주의(Gothic Revival)와 결합하여 중세 성당 바닥을 장식하던 엔코스틱 타일(Encaustic…

온돌방을 지킨 만능 마감재, 1960년대 띠벽지의 다각적 용도 분석
온돌방을 지킨 만능 마감재, 1960년대 띠벽지의 다각적 용도 분석

1. 시각적 밀도와 모조 질감: 마름모 격자가 만든 ‘종이 패브릭’ 패턴의 중심에는 미세한 그물망 형태의 해칭(Hatching)이 채워진 큰 마름모가 자리하고, 그 주변을 네 개의 작은 사각 점들이 호위하듯 감싸며 견고한 X자형 격자 구조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구성은 전형적인 ‘다이아퍼(Diaper)’ 패턴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문양과 문양 사이의 여백을 최소화하여 벽면 전체를 하나의 직조된 텍스처처럼 보이게 합니다. 강화도 화도면 1960년대 고택에서 발견된…

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