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된 무늬, 고유한 자리 — 굽도리지로 옮아온 능화문(菱花紋)
시각적 관찰 이 벽지는 한옥의 아랫벽을 두르던 굽도리지(下部帶壁紙)로,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도안의 골격은 분명하다 — 검은색 잉크로 찍힌 마름모 격자, 그 안을 채우는 색색의 작은 꽃이라는 2도(度) 인쇄 구조다. 본…

시각적 관찰
이 벽지는 한옥의 아랫벽을 두르던 굽도리지(下部帶壁紙)로,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도안의 골격은 분명하다 — 검은색 잉크로 찍힌 마름모 격자, 그 안을 채우는 색색의 작은 꽃이라는 2도(度) 인쇄 구조다. 본 사례에서는 격자 안의 꽃이 짙은 적갈색이지만, 이 도안 계열의 굽도리지는 꽃을 초록·파랑·빨강 등 다양한 색으로 바꾸어 인쇄해온 사방연속(四方連續) 패턴이다. 격자는 일정하고, 그 안에 앉히는 꽃의 색만이 변주된다.
마름모 격자가 만드는 셀(cell)은 정확히 팔각으로 잘려 있고, 격자가 교차하는 지점마다 작은 정사각의 점이 박힌다. 셀 안에는 4~5장의 단순한 꽃이 한 송이씩 앉는다. 이 구조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두 개의 이름 — 능화(菱花)와 하나비시(花菱)
한국에서 이 도안은 **능화문(菱花紋)**이라 불린다. 능(菱)은 마름이라는 수생 식물이자 그 잎의 마름모꼴 형태이고, 화(花)는 그 안에 앉는 꽃이다. 일본에서는 같은 도안을 **하나비시(花菱)**라 부른다. 한자의 어순만 뒤집힌 이 두 이름은, 사실상 같은 발상을 가리킨다 — 마름모로 짜인 격자 안에 꽃을 앉히는 구조.
두 도안이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과 일본은 18~19세기를 거치며 종이·직물의 작은 문양들을 활발히 공유했고, 능화지(菱花紙)와 하나비시 직물은 서로의 도안을 어느 정도 함께 다듬어왔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가, 누구의 것이었는가를 가르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 마름모 안에 꽃을 앉히는 발상은 한 사회의 독점물이 되기엔 너무 단순하고 보편적이며, 그 단순함 덕분에 두 문화권의 시각 어휘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갔다.
따라서 1940~50년대 한국에서 만들어진 이 굽도리지의 꽃이 일본 하나비시와 유사하다는 것은, 식민지 시기의 일방적 차용으로 환원할 일이 아니다. 양국이 이미 한 세기 이상 공유해온 동아시아의 공통 어휘가, 인쇄 매체의 시대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과다.
능화판과 능화지 — 도안이 종이에 정착하는 방식
이 공유된 도안이 한국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왔는가를 보면, 또 다른 층위가 드러난다. 조선시대 한국에서 능화문은 무엇보다도 책 표지의 가장 대표적인 바탕 문양이었다. 그 문양을 종이에 박아내기 위한 전용 목판이 따로 있었는데, 그것이 **능화판(菱花板)**이다.
Fig. 1. 능화판(菱花板) 실물. 조선시대 책 표지에 능화문을 박아내기 위해 사용된 목판. 마름모 격자와 그 안의 꽃 문양이 음각·양각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Source: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KFM00961)
능화판으로 찍어낸 한지는 그 자체로 ‘능화지’라 불렸다. 노랗게 물들인 황염지(黃染紙)에 능화판을 압착하고, 그 위에 밀랍을 입혀 광택을 내며 동시에 방습 효과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능화지로 표지를 두른 책은 아름답고, 단단했으며, 습기와 좀벌레로부터 본문을 보호받았다. 능화판의 사용 시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전(全) 시기를 관통하는 책 문화의 골격이 되었다.
책에서 벽으로 — 도안이 옮겨 앉는 자리들
능화문이 흥미로운 까닭은, 이 도안이 책 표지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은 도안 — 또는 같은 도안의 변주 — 이 한국의 거의 모든 종이·직물 표면을 가로질러 사용되었다. 책 표지(능화지), 가구의 종이 마감(싸바름), 굽도리지, 서화의 장황(粧䌙), 함과 상자의 안팎 등 능화문이 닿지 않은 자리를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전국 어느 지역의 한옥에서도 능화문 계열의 종이 마감재가 흔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은, 이 패턴이 한국 거주 문화의 공통 문법이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에 이 굽도리지의 본질적 의미가 있다. 도안 자체 — 마름모 안의 꽃 — 는 한국과 일본이 함께 만들어온 동아시아의 공유 자산이지만, 그 도안을 책 표지에서 가구로, 가구에서 굽도리지로 옮겨 앉히는 쓰임의 계보는 명백히 조선의 것이다. 일본에서 하나비시는 주로 직물(특히 키모노)과 가몬(家紋)의 영역에 머물렀다. 같은 도안을 한지에 박아 책을 싸고, 가구를 두르고, 마침내 벽의 아랫단을 마감하는 데 사용하는 방식 — 이 매체적 확장이 한국적이다.
굽도리지라는 자리
아랫벽은 손이 가장 많이 닿고 오염이 잦은 자리다. 단색 평지가 아니라 굵은 마름모 격자를 써서 마모와 오염을 시각적으로 흡수하게 하는 것은 실용적 판단이고, 묵직한 검은 격자가 아랫벽을 안정적으로 눌러주면 위의 밝은 벽지와 자연스러운 위계가 만들어진다. 책의 표지가 본문을 보호했듯, 굽도리지는 방의 아랫부분을 보호한다 — 시각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능화문이 책 표지에서 굽도리지로 옮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자리에 같은 문법이 다시 적용된 결과다.
도안은 양국이 공유했고, 자리는 조선이 마련했다. 격자는 검고 단단하며, 그 안의 꽃은 가볍고 색을 갈아탄다. 동아시아의 마름모 꽃이 한 한옥의 아랫벽에 도달해, 종이 한 장으로 오래된 약속을 다시 한 번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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